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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바이, 빨강머리 앤, PEI여, 당신도 안녕!

안봉자 시인 lilas1144@yahoo.co.kr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11-26 13:44

안봉자 시인의 <빨강머리 앤> 테마 여행기(9)
Green Gables에서 나온 우리는 가까이 있는 작은 항구 North Rustico로 이동,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초원 언덕에 올라가서 그곳에 있는 등대하우스와 그 주변을 돌아보았다.

등대지기의 살림집이 함께 붙어 있는 사각형 등대하우스는 1876년에 지은 것으로 긴 세월에 건물이 너무 낡아서 출입금지이지만, 건물 외부는 최근에 새로 페인트를 칠한 듯 흰 벽과 빨간 지붕이 날아갈 듯이 산뜻했다. 주변에 조그만 집 두세 채가 있는 걸 보아 한때 그 언덕엔 어부 가족 두어 집이 오손도손 이웃하며 살았던 것 같았다. 140년 전에 이 언덕에 살았을 가난한 어부들. ㅡ 낮이면 수평선 너머 먼 바다에 나가 일용할 고기를 잡고, 푸른 밤 먹빛 바다 위로 은하수 찬란하게 흐르면 이 언덕에 나와 앉아서 달빛 별빛을 등불 삼아 그물을 기우며 내일의 안녕을 기원했을 소박하고 착한 그들의 숨결이 느껴질 듯했다. .


<▲ North Rustico 등대하우스: 캐번디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초원 언덕 위에 138년 된 낡은 등대하우스와 두어 채이웃 집들이 아직도 먼 세월전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 (가운데가 등대하우스) >


언덕을 내려오며 잠시 들린 바닷가 모래밭에 때마침 놓여 있던 카약(Kayak) 한 척이 하도 깜찍하게 작고 예뻐서 잽싸게 사진기에 담았다.


<▲캐번디쉬 바닷가에 놓인 작고 예쁜 Kayak 한 척:  카약은 주인을 기다리고, 카약의 주인은 어디메선가 다음 밀물 때를 기다리고 ㅡ 마치 우리네 인생이 긴 기다림의 연속임을 보는 듯하다. >


North Rustico 마을엔 PEI 특산 바닷가재 (Lobster) 전문 식당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일행은 그중 한 곳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잠시 후 우리 앞 테이블 위에 싱싱하고 먹음직스런 롭스터 한 마리씩이 올라왔다. 눈과 입과 가슴이 함께 포식한 바닷가재 요리였다.


<▲바닷가재 (Lobster) 전문 레스토랑에서:  관광 제4일 날, 캐번디쉬 바닷가 North Rustico 마을에서 먹은 “PEI 특식” 바닷가재 요리 맛은 일품이었다.  >


거기서 다시 버스로 15분쯤 달려서 New London의 몽고메리 생가를 방문했다. 몽고메리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21개월간 살던 집이다. 그곳엔 그녀가 태어난 침대와 요람, 아기 적에 입던 옷과 장난감들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고, 그녀가 36세에 입었던 웨딩드레스와 그녀 생전에 펴낸 저서들과 중요한 서간들도 100여 년 전 그 시간에 조용히 멈춰 있었다.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생가 정원에서 필자 부부:  몽고메리는 이 집에서 1874. 11. 30일에 태어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21개월간 살았다.>


다음에 간 곳은 캐빈디쉬 우체국이다. 그곳은 몽고메리의 외할아버지가 설립하여 점원도 없이 혼자 일하던 작은 마을 우체국으로, 몽고메리도 젊어 한때 외할아버지를 도와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몽고메리가 일할 당시 우체국의 안팎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몽고메리에 관련된 기념사진들을 벽마다 가득히 전시해 놓은, 몽고메리의 또 다른 메모리얼 박물관이었다. 그녀의 불후의 첫 작품 ‘빨강머리 앤’도 바로 이곳에서 썼다 하여 몽고메리의 실물 크기 사진도 전시돼 있다. 간단한 기념품들을 팔기에 그림엽서 몇 장을 사서 우리 아이들에게 한 마디씩 적어서 그곳 빨간 우체통에 넣었다.

그날 오후, PEI 국립공원 바닷가에서 조개껍질들을 주우며 바라본 멀리 성벽처럼 둘러선 붉은 모래언덕들과, 절벽에 몸 던지며 하얀 포말로 부서져 내리던 파도 자락들도 나는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 캐번디쉬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줍는 필자: 어느 바닷가에서나 조개껍질을 보면 늘 그렇게 반갑다. 먼 수평선으로부터 어깨동무하고 줄줄이 달려오는 하얀 파도자락들 …>


PEI 국립공원 바닷가는 모래밭도 언덕도 온통 붉은색을 띠어서 아주 특이했다. 파랑 물감을 쏟아부은 듯 짙은 청색의 바닷물은 끊임없이 철썩이며 붉은 해안을 애무했다. 그처럼 인간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대자연의 나체 미(裸體 美) 앞에서 나는 아예 말을 잃었다. 그리곤 이 아름다운 바닷가가 등장했던 앤 시리즈 중 한 장면이 퍼뜩 생각났다.

제5권 ‘앤의 꿈의 집’에서였다. 꿈같이 달콤한 신혼의 날들을 보내던 앤이 어느 날 해 질 무렵에 남편 길버트가 윗마을에 왕진 간 사이 혼자 바닷가에 나갔다가,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하여 소녀처럼 물가 돌밭에서 춤을 춘다. 그러다가 붉은 모래언덕 위 바위에 앉아서 춤추는 자기를 내려다보는 자기 또래의 여인을 발견한다. 짓궂은 운명의 장난에 얽매여 하루하루 암담한 삶을 살고 있는, 바다의 여신같이 아름다운 레즐리(Leslie)라는 여인이다. 앤은 그 자리에서 악수를 청하고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된다.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레즐리는 2년 인가 뒤에 앤과 길버트의 도움으로 그녀를 묶고 있던 어두운 운명의 족쇄를 끊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삶을 찾는다.

저자 몽고메리가 그 장면을 쓸 때 바로 이곳 캐번디쉬 바닷가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 없다고 나는 단정해버렸다.


<▲태초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캐번디쉬 바닷가: 이 바닷가는 앤 시리즈 중 제5권 ‘앤의 꿈의 집’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


저녁에는 리조트 호텔 뒷마당에서 비빔밥과 가이드 P 씨와 운전기사가 구워주는 생굴 (Fresh Oyster) 바비큐를 맛있게 먹으며 피크닉을 즐겼다. 우리는 그렇게 PEI의 2박 3일을 꿈결같이 보내고 PEI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관광 제5일,

새벽 다섯 시 반에 호텔 프론트에서 걸어주는 전화(Wake-up call)로 모두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고 7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했다. Wood Island 발 10시 페리(Ferry)로 노섬벌랜드 해협을 건너 노바스코샤에 들어가는 날이다.

그날 아침에도 바람이 몹시 심했다. 나는 바람결에 사정없이 휘날리는 스카프 자락을 거머쥔 채 갑판 난간에 기대어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PEI를 바라보았다. 작고 예쁜 집 서너 채가 부둣가 낮은 언덕 위에서 바람 속에 떠나는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잘 있어요, 빨강머리 앤! 안녕히 계십시오, L. M. 몽고메리 여사님!

사랑스러운 Prince Edward Island여, 당신도 안녕!

삼십여 년 걸려 더딘 걸음으로 찾아갔다가, 사흘 동안 빨강머리 앤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마음도장, 눈도장 꾹꾹 찍어 놓고, 그렇게 바람 센 날 나는 PEI를 떠나 왔다.

아주 오랜 세월을 두고

가슴께로 더듬어 찾아갔었네

못다 푼 전생의 화두처럼 늘

가깝게 멀고 멀게 가깝던

그대, 그 자리

한 백 년 전 뒤안길에서

슬픔도 그대의 가슴에 닿으면

꽃이 되고 노래가 되는

연금술의 비밀

나, 아직도 못다 푼 채인데

그리움 한 켜

아쉬움 한 켜

가을 들녘 같은 가슴에

붉은 성城 하나 쌓고

황황히 그대를 떠나왔네

날개 큰 바람에 등 떠밀리듯

그렇게

노바스코샤의 주도 핼리팩스에 가는 길에 버스에서 ‘타이타닉’ DVD를 감상했다. 잠시 후 애틀란틱 해양박물관에서 보게 될 ‘타이타닉’ 호에 대한 지식을 미리 환기해주기 위한 가이드 P 씨의 배려였다. 차창 밖 언제부턴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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